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눈에 보이는 것에 열광하는 시대

by sunsethouse 2025. 5. 30.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강하게 반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화려한 영상, 세련된 외모, 완벽하게 편집된 일상.
SNS에선 하루에도 수백 번씩 누군가의 ‘멋진 모습’이 쏟아진다.
더 잘 보이고, 더 많이 보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포장한다.
이제 사람들의 평가는 ‘무엇을 보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는 점점 희미해지고,
깊이보다는 즉각적인 자극이,
진실보다는 눈에 띄는 이미지가 우선시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스스로를 ‘보여지는 존재’로 만들어간다.
내면의 울림보다 외면의 반응에 더 민감해지고,
진실한 질문보다 눈길을 끄는 표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끌려가며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껍데기’에 열광하게 되었을까?
왜 사람들은 본질이 아니라 포장에 더 끌리는가?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다.
눈으로 본 것이 진실처럼 느껴지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더 밝고, 더 크고, 더 화려한 것이
진짜 좋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히틀러는 현란한 말솜씨와 이미지로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그의 외면적 매력에 매혹되어 본질을 보지 못했고,
결국 그 선택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과연 단 한 사람만의 책임이었을까?
그를 따르며 침묵하거나 열광했던 군중들 역시,
그 비극에 대해 결코 무관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반복된다는 점이다.
역사에 대한 성찰 없이, 우리는 또다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본질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행위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형성해 가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러나 실존은 본질을 향해 열려 있고, 본질은 실존을 통해 드러난다.
실존은 단순히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내면의 나를 성찰하고, 그 성찰을 통해 더 깊은 존재,

더 진실한 나—곧 ‘본질’에 다가가려는 삶의 태도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실존만을 좇다가 본질을 망각한다면,
이는 마치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파괴하게 되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 길 위에 서 있다.
정해진 외형, 세상이 기대하는 포장,
보여지는 틀 안에 스스로를 억지로 끼워 넣으며
본질이 아닌 외형에 끌려 살아가는 시대 말이다.

좋은 직업, 잘 빠진 외모, 멋진 인생.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그 안에 깃든 마음의 소리는 점점 희미해진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시각 중심의 문화는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깊이보다,
지위나 외모, 말솜씨 같은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진짜를 보려는 노력 없이,
우리는 겉모습으로 평가하고, 소비하고, 쉽게 잊는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화려한 이미지의 이면에 묻혀버리고 만다.

우리는 지금 ‘깊이’를 잃은 시대를 살아간다.
깊이라는 것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쁘고, 너무 조급하다.
그 결과, 삶의 진실한 아름다움은 희미해지고
즉각적이고 시각적인 자극만이 남는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정말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순간도 있지 않은가?

고요한 위로, 조용한 진심, 오래된 신뢰—
이런 것들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삶을 깊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힘이다.

나는 이제 그런 삶을 더 사랑하고 싶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아도,
내 마음 깊이 남는 삶,
껍데기가 아닌, 속살로 존재하는 삶.

이제는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보여지기 위해 살지 않겠다.
이제는, 보여지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로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