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삶은 달리는 것이었고, 속도를 잃는 건 곧 실패라고 믿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고, 쉬는 건 나약함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말을 내 삶의 진리처럼 붙잡고 있었다.
어쩌면 그 믿음이 틀렸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를 막아설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어쩌면 정확히 말하자면, 멈출 수 없었다.
팽이가 돌기 시작하면 방향을 바꾸기 어려운 것처럼,
삶도 일정한 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하면 멈추거나 꺾는 것이 쉽지 않다.
팽이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줄을 옆에서 대어 밀어주는 일로 충분하지만,
인생은 더 큰 계기를 필요로 한다.
그 계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그러다, 어느 날 장벽을 만났다.
생각지도 못한 실패, 뜻밖의 병, 깊은 관계의 단절,
혹은 설명되지 않는 내면의 붕괴.
그 장벽은 이전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피하거나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라,
나를 완전히 멈춰 세우는 ‘정지표지’ 같은 것이었다.
처음엔 당황했고, 분노했고, 주저앉았다.
왜 지금 이러는지, 왜 나만 이런지, 수없이 원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 장벽은 나를 멈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깨우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기 위한 부름이었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병이 오면 병실에 누워야 하듯,
삶의 장벽은 나를 강제로 눕히고, 멈추게 만들었다.
그제야 나는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은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주지 않았고,
내게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달려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주위를 둘러보는 것처럼…
나는 처음으로 주변을, 그리고 내 안을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
늘 보던 사물들이 낯설게 다가왔고,
내면은 전에 없던 새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묻게 되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이렇게 달려왔는가?”
“이 방향이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이 맞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었는가?”
속도에 취해 있을 땐 절대 던질 수 없던 질문들이
그 장벽 앞에서 나를 찾아왔다.
달릴 때는 들리지 않던 내면의 소리가
멈춘 자리에서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장벽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평생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남들이 그어준 선을 따라
속도만 높이며 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며
나는 내가 삶을 잘 살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장벽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다시 묻기 위한 선물이었다.
삶에는 반드시 멈춰야 할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깨달음의 계기,
그건 쓰러지는 순간일 수도 있고,
혼자 남겨진 고요한 밤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다.
장벽은 괴로움으로 다가오지만,
그 속엔 삶이 던지는 물음표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진지하게 응답할 때,
비로소 삶은 ‘재시작’된다.
속도가 아닌, 방향으로.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달려가는 인생에게 장벽은 실패가 아니라 전환이다.
그 벽 앞에 멈춘 바로 그 자리가,
진짜 ‘나의 길’이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