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 인생에는 언제나 ‘목표’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좋은 대학, 괜찮은 성적, 취업이라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관문들.
그것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설정된 이정표처럼 보였다.
선생님들은 목표를 세우라고 했고,
부모님은 성실히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고 했다.
나는 주어진 틀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그 안을 채웠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목표는 ‘왜?’라는 질문이 빠진, 껍데기뿐인 목표였다.
이 땅에 존재하는 인생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런 사유 없이 목표를 향해 내동댕이쳐진 존재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임을 느꼈지만,
이미 되돌이킬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
“왜 이 길을 가는가?”
“이것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
아무도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지금의 세대는 더욱 그러하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이렇게 살아온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라고
속삭이듯 말하던 현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잊혀지고 있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
온갖 현란한 유혹과 우리를 휩쓰는 문화들은
인생이 무엇인지 사유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생각하기보다 소비하고, 돌아보기보다 앞만 보고 달리게 한다.
마치 질문하지 않는 삶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저 모두가 가는 길이라 믿었고,
그 길을 따라 늦지 않게, 뒤처지지 않게 달리는 것이 전부였다.
통찰 없이 세운 목표는 방향 없이 움직이는 배와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대학 입시는 그러한 삶의 대표적인 예였다.
학과를 고를 때도, 진로를 결정할 때도,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어떤 직업이 안정적인가’, ‘어떤 과가 잘 나가는가’ 같은
외부의 시선에 이끌렸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잘한다는 평가에 더 민감했고,
내가 바라는 것보다, 남들이 괜찮다고 하는 길을 선택했다.
세월이 흐른 뒤 별볼일 없던 학과가 주목받기도 하고,
잘나가던 학과가 빛을 잃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안목이 얼마나 얕은지를 절감하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나니 문득, 방향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목표는 여전히 있었지만, 그 목표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성취의 기쁨은 잠깐이었고, 그 뒤에 따라오는 허무감은 점점 커졌다.
왜 이렇게 공허한가?
나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살아왔다.
어느 누구보다 착실하게, 성실하게, 제대로.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걸까?
그제야 알았다.
나는 지금까지 ‘속도’에만 집중했지, ‘방향’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속도는 빨랐지만, 방향은 불분명했다.
그 결과, 멈춰 서서 바라본 내 삶은
내가 걸어온 것 같지 않은 길로만 가득했다.
이제는 다르게 묻고 싶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왜 이것을 하려는가?”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
누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결국 내 삶을 빛나게 하는 길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학창 시절에는 몰랐던 그 사실을,
이제는 내 삶에 천천히, 깊이 새기고 싶다.
더는 남들이 설정한 목표를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서 피어오른 이유와 의미를 따라가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