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그릇과 같다.
그 그릇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에 따라, 그 쓰임이 달라진다.
보석을 담고 있다면 보석함이 되고,
쓰레기를 담고 있다면 쓰레기통이 될 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그 삶의 향기와 무게가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잊는다.
내 마음의 그릇이 지금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지를.
권력, 물질, 성취—
겉보기엔 멋져 보이지만, 때로는 그것들이 인간을 부패시키고
타락의 길로 이끄는 그림자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 자연은 조용히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담고 있는가?”
아침 햇살 아래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
고요히 흐르는 강물 속에서
우리는 말없이 전해지는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느낀다.
이런 소소한 자연의 이치 속에서
우리는 문득, 인간의 본래 자리를 떠올리게 된다.
결국 인간은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땅에서 왔고, 땅으로 돌아간다.
그 말은 곧, 자연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고향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흙에서 자라는 것을 먹고 산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바로 농작물이다.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자란 인생이 자연을 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근원을 부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날이 이렇게 가물면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빵이요!” 하고 외친다.
빵이 공장에서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김치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도 결국 땅이 길러낸 것이다.
물고기라고 해서 다를까?
결국 그들도 물속에서 자라나지만,
그 물 또한 땅이 품은 것이다.
흙은 물을 머금고, 생명을 길러낸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흙은 물을 담는 그릇이다.
보이는 생명 뒤에는, 언제나 묵묵히 받쳐주는 흙의 품이 있다.
왜 인간은 자연에서 난 것을 먹고도, 그 사실을 자주 잊을까?
아마도 우리 모두가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연은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그것을 잊는다.
땅에서 길러낸 것으로 얻은 부와 명예에 취해,
그 평범하고 근본적인 진실을 망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 속에서
다시 자연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담아야 한다.
권력이나 부와 같은 외적인 찬란함이 아니라,
소박하고 진실한 ‘내면의 풍경’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마음에 자연을 담는다는 것은
단지 풀과 나무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질서, 인내, 생명의 순환,
조용한 충만함을 삶 속에 품는 것이다.
자연은 소리 없이 자라고, 조용히 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그 시듦조차 또 다른 삶을 위한 씨앗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지금 내 마음의 그릇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세상이 주입한 욕망인가, 아니면
내 삶 속에서 길어 올린 고요한 통찰인가?
마음이란 그릇은 보이는 것을 담는 장소가 아니라,
시간과 경험, 사유를 통해 채워지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그 안에 자연의 리듬과 침묵, 그리고 생명의 이치를 담을 수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근원에 가까워질 수 있다.
결국 인간은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간다.
그 여정에서 우리가 진정 담아야 할 것은
소유가 아닌 순환이며, 경쟁이 아닌 공존이며,
속도가 아닌 깊이 있는 생의 울림이다.
마음에 자연을 담고 사는 사람.
그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자기만의 조용한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는 단단하다.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삶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숙의 풍경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