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ssay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by sunsethouse 2026. 6. 2.

1.  뒤늦게 알아본 하나님의 손짓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나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돌이켜 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그러나 답을 찾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 삶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찾아왔다. 그 일을 계기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철학자처럼 인간의 존재를 깊이 탐구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다. 공학을 전공했고, 직장에 다녔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질문은 떠나지 않았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삶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은 때로는 아주 희미하게,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겁게 내 곁을 맴돌았다.

 


2. 환란은 때로 삶의 방향을 바꾼다

지금 생각하면, 내 삶에 찾아온 어려움은 나를 새로운 방향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손짓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환란의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는 없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환란의 의미를 섣불리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 삶을 돌이켜 보면, 평탄한 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막힌 길 앞에서는 보이기 시작했다.

먹고사는 일에 바쁜 평범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손짓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손짓을 알아보지 못하면, 더 큰 몸짓으로 부르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조용한 음성을 듣지 못하면, 삶을 흔드는 사건을 통해 비로소 멈추어 서게 되기도 한다.

인간에게 그것은 환란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다른 길을 가리키고 계셨다는 것을.

 


3. 늦은 나이에 받은 학위

나는 육십이 넘어서 신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 나이에 학위를 받아서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이제 와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학위를 받은 뒤 그것으로 돈을 벌지도 못했다. 학위를 활용할 수 있는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 언제나 그런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경제적인 효용이 없으면 의미도 없는 것일까.
당장 써먹을 곳이 없으면 걸어온 길은 헛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히 하나님의 손짓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고 믿었는데, 막상 학위를 받고 나니 나를 부르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약 일 년 동안 나는 계속 물었다.

하나님,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나 인간의 좁은 생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온전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4. 막힌 길과 마게도냐의 손짓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울의 길이 여러 차례 막히는 장면이 나온다.

바울은 오늘날의 튀르키예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가려고 했던 길은 계속 열리지 않았다. 그는 드로아에 이르렀고, 어느 날 밤 한 환상을 보았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간청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사도행전 16:9)

바울은 자신이 계획했던 길을 내려놓고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빌립보로 향했다.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며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길이 막히는 것은 언제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 막힘은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당시에는 알 수 없다.
왜 길이 열리지 않는지, 왜 내 계획이 번번이 어긋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알게 될 때가 있다.
막힌 길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는 것을.

 


5. 무심코 던진 한마디

어느 날, 박사과정 수업을 함께 들었던 목사님 한 분이 무심코 말을 건넸다.

“학회에 논문을 한 편 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말은 아주 가볍게 던져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논문을 다시 꺼내어 학술지 논문으로 바꾸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미 긴 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해 쓴 글이었다. 그것을 다시 읽고, 논지를 잘게 나누고, 접근 방법을 분리하여 새롭게 구성해야 했다.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큰 환란을 지나온 사람에게는 작은 환란을 넘어설 힘이 생기는 것일까.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논지를 나누고, 구조를 다듬고, 네 편의 논문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학술지에 차례로 발표했다.

 


6.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다시 읽다

내가 연구한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였다.

이 비유는 오랫동안 이웃 사랑에 관한 도덕적 교훈으로 읽혀 왔다. 물론 교부 시대에는 비유의 세부 요소를 구속의 의미와 연결하여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에게 이 비유는 대체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윤리적 교훈으로 이해된다.

그 교훈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누가는 정말로 이 비유를 단지 도덕적 교훈으로만 기록했을까?

본문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누가가 이 비유를 고립된 이야기로 남겨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누가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의 이야기와 연결한다. 또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들어가시는 장면과도 연결한다. 더 나아가 상처 입은 양을 싸매시는 목자의 이미지가 에스겔 34장과 이어진다는 점도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단지 착한 사람의 모범을 넘어, 죽음의 자리에 놓인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은 도움을 베풀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누군가가 다가오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7. 인간은 회복의 여정 위에 있는 존재다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하면 길을 만들 수 있고, 계획을 잘 세우면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

길이 막힌다.
계획이 무너진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그제야 인간은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속의 사람은 길 위에 쓰러져 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를 불쌍히 여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상처를 싸맨다.
자신의 짐승에 태운다.
그리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연구하면서 인간에 대한 답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인간이 왜 이처럼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묻자, 질문은 자연스럽게 창조와 타락의 문제로 이어졌다.


8. 인간에 대한 질문에서 창조 질서에 대한 질문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네 가지 접근 방법으로 살펴본 논문 작업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그동안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처음에는 인간의 삶에 관한 질문이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삶은 무엇을 향하여 가는가.
인간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 태어나 한평생을 살아가는 존재인가.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면서 질문은 점차 더 깊은 곳으로 이어졌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물어야 했다.
인간의 존재 방식을 알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를 살펴보아야 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며 정리한 책이 『천사와 사탄 그리고 그늘에 앉은 자』이다.

 


9. 창조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드러난 사건이다

창조는 사람이 물건을 만들듯 외부의 재료를 조립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뜻이 창조 세계 안에 드러난 것이다.

이를 철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창조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외화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나뉘어 세계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질서가 보이는 세계 안에 반영되었다는 의미다.

자연과학은 우주의 물리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빅뱅 이론을 말한다. 물론 그것과 성경의 창조 신앙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자연과학은 우주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탐구하지만, 성경은 우주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어떤 뜻과 질서를 지니고 있는지를 묻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의미 없이 흩어진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뜻과 창조 질서를 반영한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바다와 육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무질서가 질서로 정돈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10. 인간은 창조 질서를 반영하는 존재다

인간 역시 단순히 특별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외형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창조 질서를 이 땅에서 반영하도록 지음받은 존재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서고,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를 지키며, 창조 세계를 돌보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를 떠났을 때, 그 질서는 무너졌다.

에덴의 사건은 단순히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처소를 떠난 사건이다.

천사의 반역과 인간의 타락은 이 지점에서 서로 맞닿는다.
두 사건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를 떠난 존재론적 반역이다.

 


11. 인간은 창조 질서를 회복해 가는 존재다

그렇다면 구속은 무엇인가.

구속은 단지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너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천사와 사탄 그리고 그늘에 앉은 자』에서 이 문제를 특별히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에베소서는 구원받은 인간을 단지 죄 사함을 받은 개인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존재, 그리고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존재로 설명한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2)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지어져 가는 존재다.

타락으로 무너진 질서가 다시 세워지고, 떠났던 처소가 회복되며, 하나님과 멀어졌던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죄인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 질서를 회복해 가는 여정 위에 놓인 존재다.

『천사와 사탄 그리고 그늘에 앉은 자』는 바로 이 질문을 따라가며 쓴 책이다.--> https://sunsethouse.tistory.com/18


12. 지금이라도 남겨야 하는 이유

돌이켜 보면, 나는 하나님의 손짓을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삶에 찾아오는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길이 막힐 때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답답해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고, 성경을 연구하고, 지나온 길을 돌아본 뒤에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 삶의 여러 굽이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손짓하고 계셨다.
때로는 아주 작은 음성으로, 때로는 내 삶을 멈추어 세우는 사건을 통해 다른 길을 보여 주셨다.

참으로 늦게 깨달았다는 생각에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내가 알게 된 것을 정리하고 남기는 것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손짓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책을 쓰고, 논문을 정리하고, 성경을 다시 읽는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일 수 있다.
돈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효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부르심을 듣는 존재다.
그리고 늦게라도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이제 그 손짓을 따라, 내가 발견한 작은 길을 기록해 보려 한다.